준마이긴조:1972 우라카스미.
<경보: 개인적인 이야기 주의보🚨>
미야기현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케는 미야칸바이이다.
나와 와이프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사케이기도 하고 미야기현과 미야칸바이. 이름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미야기현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바로 떠오른다.
그리고 미야칸바이를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게 ‘도호쿠 대지진의 극복’에 관련된 에피소드인데, 같은 현이라 그런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양조장이 있다.
바로 ‘우라카스미’를 만들고 있는 오늘 이야기 할 양조장도 도호쿠대지진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초 칵코이한 양조장이기 때문이다. (매우 멋있다는 뜻 ㅎ)
그렇다면 우라카스미의 역사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역사
미야기현 시오가마시에 1724년. 한 양조장이 만들어진다.
지어진지 300년이 넘어가는 이 양조장이 바로 오늘날 우라카스미를 만들고 있는 ‘우라카스미 양조(浦霞醸造)’.
→ 정식 명칭은 양조나 주조가 아닌 ‘우라카스미 양조원 주식회사 사우라’ 이지만 글의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 우라카스미 양조라고 하겠다.
미무로스기를 만드는 이마니시주조(나라현 위치)가 근대 니혼슈의 원형인 청주(清酒)가 탄생한 ‘오오미와 신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듯, 양조장들은 예전부터 신사 혹은 종교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였다.
(아마도 당시엔 술에 취한 느낌이 신과 가장 가까워지는 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여럿 있다.)
그리고 1800년대에 들어와 메이지시대 후반에 미야기현의 다테가문으로부터 신사에 바칠 술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아 만들기 시작한 게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메이지 시대때 미야기현(당시엔 센다이번,仙台藩 이라고 불렸다.) 지역을 다스렸던 다테가문의 시작은 ‘다테 마사무네’였는데, 신사를 귀중히 여기고 니혼슈를 장려했기 때문에
지역 내의 양조장에 큰 관심을 가졌고 미야기현 내 사케 기술 향상에도 시간과 돈, 힘을 쏟았다.
(아마 그 때 당시 배경을 고려하자면 신사에 올릴 신성한 술이었기 때문에 장려했을 가능성이 높다.)
에도시대때 니혼슈가 가장 유명했던 지역은 나라현, 효고현등 지금의 간사이 지역 쪽이었는데, 다테 마사무네는 나라현의 청주 기술 담당자를 초빙하여 미야기현에 당시로서 첨단 기술을 배우게 했다.
(나라현이 현대 사케의 원형인 청주의 발상지인 것을 생각해보면, 미야기현에서 나라현의 기술자를 초빙한 이유가 짐작이 간다.)
당시엔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었으니 사람 한 명 모시고 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텐데, 대단하다!
1867년 시오가마 대형화재 그리고..
당시 양조장이 속해있던 시로가마 지역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던 일이 있었다.
그 때 집을 지을 나무를 공급해주고 쌀을 지원해 준 역사가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멋지지 않은가 ?
이 때 사우라 가문(양조장을 이어받고 있는 집안)이 도와준 지역이 현재 ‘사우라 쵸(佐浦町)’로 불리고 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이순신구(区) 같은 느낌.
미국으로 치면 .. 워싱턴 DC?
150년이 지난 뒤 2011년.
약 150년이 지난 2011년. 칸바이주조와 마찬가지로 우라카스미 양조에도 지진은 큰 피해를 입혔다.
그 당시에 양조장도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본인들이 잘 하는 ‘양조’를 통해 지역의 회복에 힘을 보탰다. (연대별로 설명하고 싶으니 2011년 이야기는 뒤에 좀 더 자세히..)
(2011년 4월부터 2012년 3월까지 1년 동안 ‘우라카스미 1병 판매당 5엔’과 ‘당사 주최 이벤트 참가비의 일부’를 지역인 미야기현과 지역사회의 부흥을 위해 기부했으며, 각종 자재 등의 기증도 실시했다. 또한 2012년 4월 이후에도 지역 식문화의 부흥과 관련된 지원을 계속하고 있으며, 지역의 미래를 이끌어 갈 아이들의 교육과 육성을 위한 지원도 이어가고 있다.)
1949년, 히라노 사고로씨 토지로 임명되다.
우라카스미가 첫 번째로 전국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고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양조 스타일의 근간이 되는 토지 ‘히라노 사고로’가 우라카스미 양조의 토지로 부임했다.
양조장의 청소 및 직원들의 복장 등의 태도부터 양조방법까지, A to Z를 손봤고 그 결과 전국대회에서 입상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어 히라노 사고로의 조카 히라노 주이치(平野重一)가 1960년, 토지가 됩니다. (이 시기쯤 컬러 사진이 보급됐나보다.)
주이치씨는 1960년부터 2007년까지 우라카스미 양조의 토지로 있었고 그 시기동안 수 많은 전국대회 수상과 더불어 우라카스미의 대표 모델이자 일본에 준마이긴조 붐을 일으킨 선두주자인 ‘우라카스미 젠(浦霞禅)’ 을 만드는 업적을 세웠다.
(참고로 사고로씨는 양조장의 기술고문으로 일하면서 미야기현 토지(杜氏)조합의 회장에 남부토지협회 회장까지 맡으며 제자 육성에도 힘을 썼다.)
사고로씨 뒤를 이어 쇼와 35년(1960년)부터 토지를 맡았으며 우라카스미 젠을 쇼와 48년에 냈다는 이야기.
‘사케 양조는 매 년 1학년생’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 쌀 종류가 같고 제조 방식이 같다 하더라도 매 년 양조시기의 기후가 조금씩 달라지며 쌀도 조금씩 다른 컨디션으로 재배되기 때문에 기본을 중시하고 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양조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
1972년, 지금까지도 팔리는 우라카스미의 대표 모델, 우라카스미 젠이 시대를 거스르며 탄생.
물론 당시엔 이만큼 정미한 사케가 없었기 때문에 세간으로부터 ‘너무 아로마향이 강하다’라는 평을 받았으나, 잘 만든 사케는 결국엔 살아남는다는 것을 입증하듯 니혼슈 세계에는 준마이긴조 붐이 불기 시작했고 우라카스미 젠 또한 각광을 받으며 니혼슈 팬들로부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짤막한 이야기로, 원래 젠은 프랑스에 보내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술이었으나 당시 프랑스로 수출하기 어려웠기에 결국 일본에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화룡점정. 우라카스미 양조에서 발견한 효모가 협회효모로 등록.
2011년, 동일본대지진 발생
지진 자체로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쓰나미가 뒤덮는바람에 3만병 이상의 재고와 배전판, 여과기 등 각종 기계가 먹통이 됐고 이로 인해 당시 발효중이었던 32개의 탱크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시기를 놓친 모로미들은 지나치게 발효되어 본래의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잡균이 모로미 안에 들어가 발효를 완전히 망치지는 않았다고.
왜그런가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 ⬇️
장 내 미생물이 중요하다는 얘기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장 내 기본적으로 서식하는 미생물들이 건강하다면 전반적인 건강 회복에 도움이 크게 된다는 이야기…
『양조장도 마찬가지로 사케 발효에 좋은 미생물들이 양조장 전체에 걸쳐 퍼져있었기 때문에 잡균이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게 아닐까』 라고.
(5번 출처의 pdf파일 참조)
그 뒤로 같은 현의 칸바이주조와 마찬가지로 재건에 성공. 일본을 넘어 세계에 우라카스미를 수출하는데 성공하여 현재 20개국에 수출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니혼슈 코리아’가 수입을 담당하고 있는데, 8년 전 게시물에서도 볼 수 있는 걸 보면 꽤나 예전부터 수입을 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며 (내 생각)
세계 어딘가에서 니혼슈를 좋아해 사카구라 미야모토에 방문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사카구라 미야모토는 니혼슈를 여러분의 기억에 맛과 향이 좋은 술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드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니혼슈를 단순한 술에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로 만들고 싶으신 분들, 니혼슈를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으신 분들은 사카구라미야모토 멤버쉽에 가입해 함께해주세요. 이하 컨텐츠는 멤버쉽 전용 컨텐츠입니다. 감사합니다.